더 타임즈에 실린 세계 10대 미스테리 


2탄 애거서 크리스티 실종사건






포와로, 미스 마플의 창시자인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 마니아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은 매니아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등의 작품들은 영화로도 만들어질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50년에 걸쳐 80여권의 책을 출판한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 그녀의 실종사건~!!


가사 크리스티는 1980년 미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그녀는 비행기 조종사인 아치볼드 크리스티와 결혼했다. 미스터리소설을 즐겨 읽던 그녀는, 결혼 생활 중에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이라는 첫 추리소설을 세상에 선보였다. 남편과의 불화로 1928년 이혼한 후, 고고학자였던 맥스 멜로윈을 만나 재혼했다. 1967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영국 추리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1971년에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많은 책을 낸 업적으로 영국 왕실이 수여한 데임 작위를 받았다. 생의 마지막까지 추리소설을 집필하던 그녀는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쓴 긴장감 넘치는 소설과는 달리 그녀의 일생은 평범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는 비밀스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수많은 영국인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그 사건은 1926년 12월 3일에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여류소설가 실종되다’라는 신문 1면에 난 머리기사가 수백만의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느닷없이 사라졌다.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티가 살해당했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추리소설가인 그녀가 공개적인 미스터리 사건을 만들기 위해 교묘한 계략을 꾸민 것이라고도 했다. 자신의 소설에서 살인사건의 무대로 사용했던 인근 호수에서 자살한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몇 시간 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차가 발견되었다. 차 안에는 그녀의 외투와 물건만이 남아있었다. 전국적인 수배가 내려지고, 수백 명의 경관과 15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동원됐지만 그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크리스티가 발견된 것은 사라진지 11일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해로게이트 지역의 호텔에서 머물고 있었다. 호텔 숙박부에 ‘테레사 닐’이라는 이름을 기입한 상태였다. 또, 일간지 광고란에 ‘테레사 닐의 친구나 친척 되는 사람은 해로게이트의 하이드로패식 호텔로 연락바람’이라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크리스티는 투숙하는 동안, 온천욕을 하면서 다른 손님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하기도 하고, 사라진 여류작가의 실종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사라졌던 10일 동안 크리스티는 이전의 기억을 송두리째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확실히 기억상실증에 걸렸는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아직까지 그녀의 실종 사건과 기억상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왜 기억을 잃었던 것일까. 혹은 왜 기억을 잃은 척을 했을까. 그녀는 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하자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후를 수습하며 슬픔을 혼자 이겨내야 했다. 또한, 크리스티의 남편은 항상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혼자 놔둔 채 런던에 있는 골프클럽으로 떠나, 몇 개월 후 함께 골프를 치던 ‘낸시 닐’이라는 젊은 여성과 함께 돌아왔다.(호텔 투숙 시 크리스티가 사용한 ‘테레사 닐’이라는 예명과 성이 같다) 그는 곧 크리스티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사생활마저 언론에 노출되자 크리스티의 충격은 더욱 커졌다. 남편과 이혼한 후, 14세 연하였던 맥스 맬로윈과 재혼한 크리스티. 두 번째 남편의 외도로 그녀는 또 상처를 입는다. 크리스티는 과거의 끔찍한 경험 때문인지 남편의 모든 잘못을 덮고, 행복하고 평온한 결혼생활인 것처럼 가장하며 살았다. 모든 상황이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심적 고통이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 기억을 잊고, 결국 실종이라는 현실 도피를 선택했던 것일지도.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로 독자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 타인을 살해하는 방법을 고안하며 평생을 살았지만, 사실 그녀는 내면의 깊은 상처를 간직한, 수줍음을 많이 타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비밀스럽지만 불꽃같았던 크리스티의 인생 이야기를 그녀가 평소에 무척 사랑했던 시구로 끝내려 한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비 위에 새겨져있는 시구이기도 하다.

노고 끝의 단잠
폭풍우 몰아치는 항해 뒤의 귀항
걱정 끝의 휴식
삶 뒤의 죽음
그리하여 아주 만족하느니.
 
- 에드먼드 스펜서 <요정 나라의 여왕> 中

Posted by Ezcode
:

더 타임즈에 실린 세계 10대 미스테리


1탄. 체이스일가 관의 비밀





1812년 당시 영국 식민지이던 중앙아메리카 섬나라 바베이도스

노예상인이던 영국귀족 토머스 체이스가 병으로 죽었다


체이스는 현지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뤄 악명이 자자했고

그래서 그가 죽자 노예들이 기뻐하며 난리였다

여하튼 8월 9일  체이스 집 지하납골당에 그 시신을 담은 관을 넣을려던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이전에 있던 체이스 일가 시신이 담긴 관 3개를 누군가가 건드렷던거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는데...

체이스 어머니 관은 서있었고 관들이 각자 누군가에 의해서 마구 흐트려져잇었다.

납골당은 두터운 철문으로 몇 겹 잠겨져있었고 창문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다시 관을 제자리에 두고 체이스가 담긴 관을 새로 옮겨놓는다.

 




1816년 9월 25일

체이스 집안에서 11살난 아이가 병으로 죽어서 다시 납골당을 연 사람들은 놀랐다

또 관들이 뒤집어져있고 일어서있고 시체가 나와있엇다.

 

체이스 집안 사람들은 체이스의 가혹한 짓에 증오를 품은 노예가 한짓이라고 분노햇지만

지하납골당으로 들어갈려면 열쇠와 온갖 문을 어찌 열고 들어갔다는 건가?

하지만 증거도 없으니 노예를 닥달할 수도 없으니 원상복구만 시켜놓는다.


1816년 10월 23일

체이스 늙은 숙모가 죽어서  다시 관을 넣을려니 

5개 관 모두가 뒤집어졌으며 시체는 뒹굴고 있는 거 있었다고한다.

이제 견딜 수 없던 체이스 집안 사람들은 다시 관을 원래대로 두고 납골당안에 잔뜩 모래를 뿌려놓는다.

누가 들어오면 발자국이 남을테니깐


1819년 7월 7일

또 체이스 집안 사람이 죽어서 다시 납골당 문을 열 때가 왔고 설마하며 문을 열어보니.. 

어디에도 발자국은 없고 모래들 또한 그대로인데

 관들은 다 뒤엎어지고 서있고 아주 각각 엉망이엿다

"유령이다!"

"체이스에게 괴롭힌당한 노예들 원혼이 죽은 이들을 가만히 쉬지 못하도록 하는 거야!"

이런 소문이 들리며 납골당에 사람들은 얼씬하기도 싫어한다

 

이런 가운데 토머스 오더슨 목사가 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오더슨은 다시 모래를 뿌리고 관을 사슬로 감아두었고

그리고 비밀통로가 있나 조사하였으며 여러가지를 추정을 햇다

 

 


첫째 물이 새어서 관이 움직였다.


하지만 조사결과 체이스가 담긴 관만 해도 무거운 쇠관이라 5명 이상 남자가 들어야 하는 관이며

이걸 물이 움직였다면 대단한 홍수가 나야한다는 결론

그리고 물기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으며 모래가 그대로 있엇으니 추정 실패


둘째 그럼 누군가가 실이나 육중한 사슬로 관을 묶어서 움직였다

그럼 철문부터  바닥에 둔 모래에는 아무런 발자국이 왜 없는가? 게다가 관에 그런 흔적이 아예 없으며

체이스가 들어간 관은 쇠로 만들어져 웬만한 실같은 것으론 어림도 없다.


셋째 모래를 피해 벽에 뭘 박으면서 움직였다 

그러나 벽 곳곳을 자세히 조사해도 뭔가 박힌 흔적은 절대 없었다.



결국 오더슨 목사는 철문에도 묶어둔 사슬에도 밀가루를 묻히고 곳곳에 누가 들어오면 알 수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1820년 4월 18일. 

누가 죽어서가 아니라 갑자기 오더슨 목사와 사람들이 들이닥쳐 조사하기시작햇다.

역시나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체이스가 들어간 관은 벌떡 서 있고 관 모두가 뒤집어져있엇다. 묶어둔 사슬도 풀어져있었고.

충격적인 건 사슬 어디에도 사람손자국은 없다는거다.


결국 식민정부는 체이스 집안 납골당을 폐쇄하며 관은 다른 납골당으로 옮긴다

그 후로는 이전같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왜 관들이 마구 움직였던 걸까?



추리작가이자 더불어 심령학에 관심이 큰 코넌 도일(홈즈로 유명한)은 이 사건에 대하여 

조사를 해보았는데(아쉽게도 도일이 살아있을 때 그 바베이도스 집은 헐렸다.)

그도 원혼의 짓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중도 포기했다.

Posted by Ezcode
:



 이소룡과 아들 브랜돈






과연 이소룡은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저주에 의해 사망한 것 일까?


영화 Dragon The Bruce Lee Story에서는 이소룡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철갑무사와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나 이소룡 집안의 저주를 아는 이들은 그것이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194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1973년 7월 20일에 사망한 이소룡은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가위에 많이 눌리는 체질이었으며 꼬마였던 

이소룡은 가위에 눌릴 때마다 검은 그림자와 같은 괴 형상을 봤다. 








미국의 시애틀에 있는 이소룡과 아들의 무덤사진





18살이 되던 해 가위에 눌린 그는 처음으로 그림자 같은 가위귀신이 "너의 아버지는 64세에 죽고 너는 그의 반도 못살아" 라고 말하는 

저주의 음성을 듣고 겁에 질렸다. 이소룡은 그때부터 귀신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홍콩의 유명한 풍수전문가의 조언대로 가위귀신에게서 벗어나도록 미국으로 이민간 이소룡은 미국에서 조차 가위에 

계속 눌리자 공포에 떨었다.


매일 밤 이소룡은 자신을 찾아오는 검은 그림자 귀신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고 미국에 이주한지 몇 년 후 그의 아버지는 귀신의 저주처럼 64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소룡이 죽기전날 찍힌 기괴한 심령사진






1973년 용쟁호투를 찍는 도중 갑자기 검은 그림자 귀신이 자신을 덮쳐 놀라 쓰러졌다. 

이를 목격한 조명 기사들은 이소룡이 떨어진 안경을 줍는척하는 기괴한 상황을 연출했다는 증언을 했다.


그후 이소룡은 사망유희를 촬영하다 33살에 사망했으며 죽기 전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 이어지지 않게 큰돈을 들여 풍수지관들의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역시 1995년 아버지 이소룡을 추모하는 영화 개봉을 앞두고 영화 '까마귀'를 찍다 총기 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브랜돈의 죽음을 지켜본 주위사람들은 이소룡 집안의 저주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죽기직전 자신을 죽일 44구경 권총을 손에 쥐고있는 브랜돈






이소룡의 친형제들은 이혼했거나 사망했고 이 같은 상황이 저주에 의한 벌이라고 믿고 있는 가족들은 저주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무덤으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1929년 12살의 나이로 죽은 홍콩의 풍수신동 성링루의 옆에 묻힌 이소룡의 친할아버지는 자신이 죽기 전 "신동이 꿈에 나타나 

당신이 내 옆에 묻히면 당신 집안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이소룡의 집안은 홍콩 최고의 명당에 묻힌 그의 친할아버지의 묘자리 덕에 큰 영화를 누렸다가 옆에 묻힌 신동의 저주에 의해 풍비박산이 난 것일까?  






Posted by Ezcode
: